설교의 정의와 설교의 5대원리

제1장 SPS Preaching 

1. 설교의 정의 

   설교의 정의가 왜 중요한가? 설교는 설교자의 관점과 설교자의 목적성이 있기 때문에 설교자마다 설교의 정의가 다르다. 이렇게 설교의 정의가 다른 것은 설교자마다 설교의 세계관과 설교에 대한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설교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설교를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설교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를 하기에 앞서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자신의 관점을 가지고 설교의 정의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SPS(Spiritual Preaching System)에서 내리는 설교의 정의는 다름과 같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설교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냄으로 청중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설교 정의의 허구성

   대부분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 정의는 허구성이 있다. 설교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설교의 정의와 자신이 실제로 하는 설교의 목적과 관점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것을 설교 정의의 허구성이라고 한다. 설교자는 자신이 내린 설교의 정의와 목적이 설교자의 관점에 따라 설교를 해야 한다.    

               

                   

                               그림) 설교의 5대 원리

2. 설교의 5대원리

   설교에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SPS(Spiritual Preaching System)에서는 설교의 5대 원리라고 한다. 첫째 성령의 사역, 둘째 설교자, 셋째 예수 그리스도, 넷째 청중, 다섯째 하나님이다.

1) 성령의 사역

   설교는 실제적으로 설교자를 통해서 전달되지만 설교는 성령 사역의 핵심이다. 설교는 설교자가 청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해서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성령과 설교자 

   설교는 성령을 통해서 설교자에게 역사해야 한다. 설교자의 머리에서 나온 설교는 청중의 머리만 움직이지만 설교자의 가슴에서 나온 말씀은 청중의 가슴을 울리고 청중을 신앙적 결단을 하게 한다. 설교자의 가슴에서 말씀이 나오기 위해서는 설교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의 성공과 실패 즉 설교를 통해서 청중이 은혜 받는 설교는 설교자가 강단에 올라가기 전에 판가름 날 수 있다. 설교자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설교는 어떤 의미에서 청중에게 감동을 줄 수 없기에 실패한 설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의 실패와 성공의 핵심은 설교자를 통해 부어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이다. 설교자는 아무리 설교를 철저하게 준비한다 할지라도 설교의 최종적인 준비 성령의 충만함이 없다면 그것은 설교를 완전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설교는 기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골방에서 승리한 설교자는 강단에서 승리하고 골방에서 실패한 설교자는 강단에서 실패하게 된다. 성령은 설교자로 하여금 설교자로서 무장하게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처음과 마지막이 성령이 충만한 설교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고전2:4) 바울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지식과 논리를 가진 자였다. 어떤 사람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울은 내 전도함 즉 자신의 설교에서 자신의 논리적 설득력 있는 지혜로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말에는 자신의 겸손함도 있겠지만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 뼈저리게 자신이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백하는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무능함을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는 청중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의 설교에서 성령의 역사를 철저하게 의지하였던 것이다. 성령이 충만한 설교자가 성령이 충만한 청중을 만들어 낸다. 설교자가 설교에 대한 열정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나온다. 성령이 설교자에게 열정을 준다. 열정이 없는 설교자는 불이 꺼진 숱과 같다. 아무 능력도 영향력도 청중에게 미치지 못한다.

성령과 청중

   설교자는 가끔 자신의 능력으로 청중의 마음을 열려고 애를 쓴다. 설교자가 실패하고 낙심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청중의 마음을 여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설교는 설교자가 아무리 철저히 준비를 해서 청중에게 전달을 한다할지라도 청중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성령만이 청중을 변화시킨다. 성령은 인간의 무능력과 죄를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닮게 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깨닫고 믿게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해하고 사모하게 한다.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설교는 어떤 설교인가?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성령이 강하게 나타나기를 열망한다. 물론 성령이 강하게 나타나는 설교는 설교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설교자가 성령이 충만하면 당연히 그의 설교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설교를 내용적으로 분석할 때 어떤 설교가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드러나는지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설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많은 설교 가운데 예수님이 강하게 선포되어지는 설교는 항상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사우스이스턴의 설교학 교수인 그렉 하이슬러는 “성령의 능력이 부여된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증거를 한다.” 고 말하였다. 그리고 C. H. 스펄전도 “성령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가르쳐 준다. 우리 설교의 핵심 주제이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설교는 그리스도가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설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설교가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드러나기 위해서는 설교자가 예수를 강하게 선포해야 한다.         

2) 설교자

   설교자는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남음과 모자람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 남음의 정체성은 설교자 자신이 청중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청중보다 더 믿음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을 설교자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가 많은 청중 앞에 설교를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실수하는 것이다. 자신이 신앙적으로 완벽하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때로는 청중보다 믿음이 없고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없을 때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설교자가 설교자로서 사명을 잃을 때 더욱 그렇게 드러난다. 두 번째로 설교자의 모자람의 정체성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될 때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고 청중 앞에 서서 설교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가질 때가 있다. 자신의 모자람 때문에 나 같은 것이 설교를 한다고 누가 듣겠어? 어떤 사람이 변화되겠어?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 이전에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확인하고 설교에 임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는 다음 몇가지를 확인하고 설교를 해야 한다.

설교자가 가장 먼저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것은 설교자는 자신이 복음화 되었는가? 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믿음 없이 설교하는 설교자가 너무나 많이 있다. 설교자는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무엇보다 믿음이 가지고 전해야 한다. 

구령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열정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설교자는 구령에 대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설교의 내용보다 구령에 대한 열정이 청중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했는가?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체험의 종교라는 것은 기독교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죽은 종교가 아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복음에 능력이 나타난다. 

성령이 충만한가? 바울의 말처럼 설교자는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설교자가 성령이 충만할 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사랑이 있는가? 설교는 청중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을 책망적인 설교를 할 때에도 사랑을 가지고 전해야 한다. 

올바른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첫 단추를 잘못 꿰매면 마지막에 어긋나듯이 설교자는 올바른 신학적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 할지라도 건강에 좋지 못하면 아무소용 없듯이 설교의 내용이 좋아도 잘못된 성경지식을 전달한다면 청중에게 하나님의 뜻을 잘못 전달하게 된다. 잘못된 성경지식이 잘못된 진리를 전하고 잘못된 청중을 양성한다. 

소명의식이 있는가? 이 질문은 설교자를 설교자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설교자는 나는 하나님이 세운 이 시대의 설교자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설교자가 어떤 사역의 위기를 맞이한다 할지라도 모든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질문들이 설교자에게 가장 저급한 질문일 수 있으나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설교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질문이 된다. 

설교자와 영성      

   설교자에게 영성이 있어야 한다. 청중은 설교의 내용보다 설교자의 영성에 먼저 주목한다. 이 시대에 영성 있는 설교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영성이 있는 설교자는 가볍지 않다. 권위가 있다. 권위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6:4)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3:5)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3:7) 설교자의 영성은 말씀과 기도가 핵심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말씀과 기도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아더 핑크는 일년에 성경을 3독씩 10년을 읽었다. 설교자는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읽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설교자는 스스로 나는 성경을 많이 안다고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성경의 대가였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지식에 있어 예수님 앞에 초라한 어린아이에 불과하였다. 설교자가 성경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은 청중을 가르칠 목적이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읽을 때가 있다. 설교자가 성경을 읽을 때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먼저 자신이 은혜를 받기 위해 읽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 목적을 가지고 쓴 글이 아니기에 각자 성경을 읽는 방법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러면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성경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설교자 각자 나름대로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설교 본문을 많이 읽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본문 일수록 더욱 그렇다. 설교 본문은 많이 읽을수록 좋다. 의외로 성경을 여러번 읽으면서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설교자는 설교 본문을 적어도 10번은 읽어야한다. 여러번 본문을 읽게 되면 분명히 아는 사실은 설교의 인사이트가 잘 보인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성경을 읽을 때 여러번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점을 가지고 읽는 것이다.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읽게 되면 설교자는 많은 인사이트와 설교의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왜냐하면 관점이 내용을 만들기 때문이다.

SPS(Spiritual Preaching System)에서는 설교 본문을 관점으로 읽는 방법이 있다.

첫째로 설교 본문을 AW(Aim Word)와 AWE(Aim Word Explanation)로 읽는다. 

둘째로 설교 본문을 CW(Core Word)로 읽는다. 

셋째로 설교 본문을 TOOL로 읽는다. 

이렇게 성경을 관점으로 읽는 방법은 추후에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바운즈(E.M. Bounds)는 그의 책 기도의 능력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설교자의 능력은 기도의 능력이다. 하나님과 교통하여 좋은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그의 능력에 달려 있다. 기도의 능력은 거의 증명되지 않고 가능성도 거의 이해되지 않지만 기도는 없어지지 않는다. 설교의 모든 부분이 기도의 진통 속에서 나와야 한다. 설교의 시작과 마지막은 간구의 기도 찬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전달은 기도의 용광로에서 나온 사랑으로 감동적으로 열성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바운즈의 말처럼 설교자는 기도의 능력을 통해서 설교의 능력이 나타난다. 기도는 설교자로 하여금 본문을 믿게 하고 이해하게 만든다. 설교자가 기도할 때 청중적 적용점을 찾을 수 있으며 설교의 내용을 만들고 효과적인 설교를 하게 한다.     

 

설교자와 설교

   설교는 설교자가 원하는 것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씀을 이 시대의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청중에게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 설교자의 인격과 감정을 배재하지 않는다. 설교자는 자신의 인격과 감정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설교를 만들어 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득의 3대 요소 logos, ethos pathos가 있다. 설교는 설교자가 청중을 설득하는 것이라면 이 3대 요소와 설교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로 설교자와 말씀(Logos)의 관계성에서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성경에 대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설교를 잘 할 수 없다. 

설교자와 인격(성품, ethos)의 관계성에서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인격은 설교자의 그릇이다. 설교자가 자신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설교자의 설교 내용이 달라진다. 설교자가 진리를 전한다 할지라도 설교자의 그릇이 더러워져 있으면 참된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 설교자는 자신의 그릇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항상 정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12:35) 

셋째로 설교자와 열정(감정, pathos)의 관계성에서 “열정이 사람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세상은 열정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다. 설교자의 열정은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이 충만할 때 설교자의 열정이 나타난다.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가장 열정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가장 열정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가장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위 세가지 요소 중에서 설교자가 청중을 변화시키는 것의 80%가 인격(ethos)과 감정(pathos)이다. 설교자가 아무리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인격 즉 그릇이 잘못 되어 있으면 청중들을 그 열정을 에너지로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인격을 다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설교자와 연습

   설교를 연습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설교자들이 동의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대한 설교자를 살펴보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설교의 연습을 통해 한 시대에 위대한 설교자로 쓰임 받았다. 강해설교가의 대가인 해돈 로빈슨은 “큰 소리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우리 생각을 구체적으로 만들어준다. 또한 본문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설교자가 준비한 설교를 가지고 연습할 때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정확하고 명확하게 청중에게 전달할 있게 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설교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 연습에 매진해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연습을 통해 얻는 유익은 첫째로 설교자는 연습을 통해서 설교자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설교자로 하여금 믿음이 커지게 한다. 둘째로 연습을 통해서 설교자는 설교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고 설교에 대한 확신지수가 높아진다. 셋째로 설교자는 연습을 통해서 내적 치유가 된다. 내적치유가 이루어지는 것은 설교자가 연습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 것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으며 더 중요한 이유로는 SPS 설교가 갖는 독특성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습을 통해 설교자의 설교가 향상된다. 연습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스포츠 뿐만 아니라 한 분야에 우뚝 선 사람들의 공통점은 연습이었다. 김연아, 강수진, 타이거 우즈, 이충희 등

 

설교자와 말 

  설교의 전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이다. 설교자의 말에는 죽은 말과 살아있는 말이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죽은 말로 설교를 하는 이가 있고 살아있는 말로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이도 있다. 살아있는 말은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의 말을 신뢰하고 확신을 갖게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말은 청중에게 감동과 변화를 준다. 설교자는 살아있는 말을 통해서 설교의 능력이 나간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말과 죽은 말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보이스를 통해서 살아있는 말을 알 수 있다. 살아있는 말을 들어 보면 강한 소리와 약한 소리,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긴 소리와 짧은 소리를 통해 고저장단의 소리를 내야 살아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생생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이러한 소리가 혼합되어 나타난다.

두 번째로 표현법에서 살아있는 말을 찾을 수 있는데 표현법에서 살아있는 말은 대부분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려면 구체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때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가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보이스와 표현법 이 두가지를 적절하게 설교자는 사용해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 말에서 어떤 설교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를 살펴보면 설교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경우가 많다. 성경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님 자신도 구약은 자신을 증언한다고 말한다.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였다. 초대교회의 두 기둥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였다. 찰스 스펄전(C. H. Spurgeon)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그는 복음의 전부이시며 그의 인성과 직분들 그리고 그의 사역만이 우리의 유일하고도 위대한 그리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주제 이어야 한다” 개혁파 설교학자 훅스트라(Hoekstra) “그리스도 없는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시대를 넘어 지역을 넘어 언제 어디서나 설교의 핵심은 그리스도여야 한다. 

4) 청중

   청중이란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좁은 의미에서는 성도요 넓은 의미에서는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다. 청중은 다양성이 있다. 연령, 신앙의 칼라, 신앙기간, 학력, 헌신도, 직분, 신앙체험 정도, 문화, 환경에 따라 청중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청중의 범위는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불신자, 초신자, 기존신자, 사역자로 나눌 수 있다. 설교자는 이렇게 청중의 다양성과 범위를 구분할 수 있어야 청중의 필요를 채워주는 설교 즉 청중이 공감하는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자는 청중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이 누구인지를 구분해야 청중의 대상에 따라 설교가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 

 설교자는 설교 후 청중에 대한 반응을 살펴봐야 한다. 크게 다섯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본다. 

첫째로 설교에 대한 청중의 관심 정도 

둘째로 설교에 대한 청중의 이해정도 

셋째로 설교에 대한 청중의 감동 즉 은혜정도 

다섯째로 설교에 대한 청중의 변화 정도 즉 타인에게 은혜 받은 것을 나누고 있는지에 대한 영향정도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설교자는 청중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좋은 멘토를 만날 때 인생이 바뀐다. 청중은 어떤 멘토를 만나야 가장 크게 그의 인생이 바뀌는 것인가? 그것은 청중이 하나님을 경험할 때 가장 크게 변화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청중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설교를 해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때 가장 큰 감동을 받는다. 설교를 통해 설교자가 하나님을 말하지 못하고 보여주지 못한다면 청중은 하나의 좋은 연설을 듣는 것과 같다.  

5) 하나님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자신이 원하고 청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WANT를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설교를 설교되게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청중이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이 음성으로 들어야 한다. 그런데 설교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후레드 크레독은 “설교는 사람의 말인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은 설교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오류가 있다는 말은 설교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완전하지 않다.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에는 권위가 있다. 권위가 있다는 것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설교를 할 때 이 두가지를 가지고 겸손과 확신을 가지고 선포해야 한다.  

6) 설교의 5대 원리와 상관관계

   설교의 5대원리는 서로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설교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설교의 능력을 아무에게나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각성될 때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다. 각성이란 하나님을 만날 때 이루어진다. 설교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설교의 능력을 받고 청중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 청중은 자신이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을 받게 된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은 청중은 설교자에게 열매로 나타난다. 그의 삶이 변화되기 때문이다. 변화된 청중은 설교자에게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이 설교자의 열매이다. 변화된 청중은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찬양 즉 하나님 중심의 신앙의 삶으로 바뀐다. 하나님은 변화된 청중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이다. 설교자는 무엇을 전해야 하며 청중은 무엇을 들어야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설교의 핵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설교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설교에는 아무 능력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설교의 능력은 설교자의 각성을 통해 설교자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이며 그 능력을 통해 청중의 문제해결과 열매로 나타난다. 변화된 청중은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은 청중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데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일어난다. 

7) 설교에서 5대 원리의 필요성

   설교의 5대 원리는 설교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설교에서 5대원리는 상호 연관성이 깊다. 그래서 설교의 5대원리 중 한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설교로서 존재하지 못하며 설교로서 성립되지 못한다. 하나님이 없는 설교는 있을 수 없다. 설교자가 설교를 하고 청중이 설교를 들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설교자가 없다면 설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에 대언하기 원하신다. 물론 설교자가 없어도 하나님은 이 시대에 청중에게 말씀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설교자를 세우고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설교의 핵심이다. 설교에서 핵심인 예수님이 빠져있다면 설교가 될 수 없다. 연극에서 모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주연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연극을 할 수 없듯이 설교에서 예수님이 빠져 있다면 참된 설교가 될 수 없다. 설교는 청중을 위한 것이다. 설교자가 있고 말씀이 준비되어 있어도 설교를 듣는 사람이 없다면 설교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설교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설교는 좋은 연설에 불과하다. 좋은 연설과 설교가 구분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그래서 설교는 5대원리가 극명하게 모두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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